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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평양의 낙랑군과 해상으로 교역했다
전술하였듯이 新錢(소위 왕망전)은 김해를 중심으로 남해안과 제주도 대마도 구주 북쪽에서 상당량이 발견되며, 강단유사사학이 한4군 지역이라 사기 치는 북한과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미미하게 확인된다. 이는 왕망 정권의 실세였던 김씨 집단이 김해로 도망 온 것을 의미하며 CE 42년의 가야 건국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김해패총에서 출토된 王莽錢, 김해 良洞里 토광묘의 後漢代 尙方鏡, 창원 茶戶里 목관묘에서 나온 前漢代 星雲鏡·五銖錢·琴形帶鉤·小銅鐸, 창원 성산패총에서 나온 五銖錢 등은 낙랑과의 교역을 방증해 주는 것들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 대로 新錢이 평양의 낙랑군과 가야의 교역에 사용되었다면 낙랑군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新錢은 김해와 평양과의 교역과는 무관하다고 보아야 한다. 동아시아의 무역은 백제에 의해 행해졌다. 가야는 백제가 행하는 무역의 상대방에 불과하였고, 백제의 무역권에 대항할 정도의 힘이 없었다. 따라서 강단유사사학이 제시하는 가야 무역의 증거들은 가야가 백제가 행하는 무역의 상대방이라는 증거에 불과하다.
강단유사사학은 『삼국지』와 『후한서』를 오해하여 가야가 철의 주산지로서 낙랑군과 무역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삼국지』는 변진의 철이라 하고, 『후한서』는 진한의 철이라 하는데, 변진과 진한 모두 韓 지역의 신라를 가리킴은 전술하였다. 남한에는 변한 진한 변진이 있었던 적이 없다. 韓 지역 신라의 철이 좋았던 이유는 석씨 집단이 당시 질 좋은 철을 생산하였던 남인도 타밀에서 왔거나 타밀인들의 기술을 습득하였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어떻든 『삼국지』와 『후한서』가 말하는 철 생산자와 가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가짜 무역을 만들고, 가야가 낙랑군과 왜 신라의 중개무역으로 번성하였으며, 낙랑군이 평양에서 없어지자 가야가 약화되었다고 한다. 가야가 약화되자 포상팔국이 가야를 공격했고, 가야는 교역상대를 낙랑군 대신 백제로 변경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망했다고 한다. 전부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고 그들의 소설이다. 특히 포상팔국의 공격이 『삼국사』와 『삼국유사』에서 3세기 초라고 나와 있음에도, 어떤 근거도 없이, 오직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충성하기 위해 4세기에 있었다고 사기 친다. 그들은 가야가 해상으로 평양의 낙랑군과 김해 사이의 무역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당시의 항해기술상 김해와 평양간 항해는 백제의 해안을 따라서 행해져야 하므로, 백제가 가야의 영향권 내에 있지 않는 이상, 가야의 독자적 무역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평양에 낙랑군은 없었고, 평양은 고구려의 한성이므로, 평양과 김해의 무역은 고구려와 가야의 무역이 된다. 즉 그들의 낙랑군과의 교역 소설은 낙랑군 평양설에 의존하므로, 낙랑군 평양설이 사기임이 드러난 이상 코미디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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