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남가라가 김해라 주장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남가라는 김해일 수가 없다. 「일본서기」의 남가라 관련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ㄱ) 249년
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려 비자발(比自?), 남가라(南加羅), 탁국(?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ㄴ) 527년 6월
21년 여름 6월 임신삭 갑오(3일), 근강모야신이 무리 6만을 거느리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남가라(南加羅)와 탁기탄(?己呑)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때 축자의 국조(國造) 반정이 은밀히 반역을 도모한 지 수년이 지났다.
(ㄷ) 529년 3월
같은 달, 근강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신라에 천황의 칙을 전하여 남가라와 탁기탄을 재건토록 권하였다. 백제는 장군 군윤귀, 마나갑배, 마로 등을 파견하여,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들었다. 신라는 번국에 있는 관가를 멸망시켰으므로 두려워하여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보내지 않고, 부지나마례와 해나마례 등을 안라에 보내어 조칙을 듣게 하였다. 이때 안라는 새로 고당(高堂)을 만들어 칙사를 오르게 하였다. 안라의 국주는 그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으며, 안라의 관위가 높은 자도 한두 사람이 당에 올랐으나 백제의 사신 장군 군(君) 등은 당 아래에 있었다. 여러 달 동안 당 위에서 회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장군 군 등은 당 아래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ㄹ) 541년 4월
성명왕은 “---탁기탄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서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망한 것이다.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멸망한 것이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할 수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탁순은 임금과 신하가 나뉘어 뿔뿔이 흩어져 왕 스스로가 귀부하려는 생각으로 신라에 내통하였다. 이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이 패망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ㅁ) 541년 7월
그리고 (성명왕은) 임나에게 “--- 따라서 지금 선대의 화친의 우호를 존중하여, 삼가 천황의 조칙에 따라 신라가 빼앗은 남가라, 탁기탄 등을 빼앗아 본관에 되돌려 임나로 옮기고 영원토록 부형으로 삼아 항상 일본을 섬기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ㅂ) 544년 3월
3월에 백제가 나솔 아탁득문, 허세 나솔 기마, 물부 나솔 가비 등을 보내서 표를 올려 “---만약 탁순국의 왕이 신라와 내통하여 적을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어찌 멸망에 이르렀겠습니까. 여러 나라가 패망한 화근을 두루 살펴보면 모두 내응하거나 딴 마음을 품은 자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마도 등이 신라와 마음이 통하여 그 옷을 입고 밤낮으로 왕복하면서 은밀히 나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나가 영원히 망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임나가 만일 망하면 신의 나라도 고립되어 위태롭게 됩니다.---”
(ㅅ) 600년 2월
8년 봄 2월에 신라와 임나가 서로 싸웠다. 천황이 임나를 구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 경부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수적신을 부장군으로 삼았다[모두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1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임나를 위하여 신라를 치려하였다. 이에 즉시 신라를 목표로 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그리고 신라에 이르러 5성을 공략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두려워하여 백기를 들고 장군의 휘하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다라(多多羅), 소나라(素奈羅), 불지귀(弗知鬼), 위타(委陀), 남가라(南迦羅), 아라라(阿羅羅)의 6성을 할양하고 항복을 청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가 열도를 처음 점령할 때, 남가라, 탁(탁기탄), 탁순은 신라마을의 영토였다. 백제 담로는 신라마을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남가라 탁기탄 탁순 등 신라7국을 신라마을의 관할에서 제외하였다. 신라마을은 열도의 남북국 시대 고구려 지배 하에서 남가라 탁기탄 탁순을 탈환하였다. 백제마을은 백제가 다시 열도를 전부 지배한 후, 이 세 지역을 신라로부터 떼어내어 임나마을의 관할로 하려 한다. 백제 왜왕은 백제와 임나의 편을 들면서 신라마을의 세력을 억제함으로써, 마을국가들 사이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따라서 위 이야기의 백제 신라 임나 남가라 탁기탄 탁순 등은 열도의 마을국가명이나 지명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남가라를 김해, 탁기탄을 낙동강 동안의 영산,탁순을 창원이라 주장한다.「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세 지역은 527년 6월 이전에 신라마을에 탈환된다. 열도의 남북국 시대에 탈환될 것이므로 5세기 초중반에 탈환되었을 것이다. 김해는 532년 최초로 신라 영토가 되므로 369년(249년) 이전에 신라의 영토였다가 369년(249년)에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가 5세기에 다시 신라가 되는 신라7국의 남가라가 김해일 수는 결코 없다. 고대국가의 일반적 국경선에 비추어, 낙동강 동쪽에 임나=가야의 영토가 있다는 것도 그들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영산을 527년 이전 어느 시기에 신라가 임나=가야로부터 탈취하였다는 사료도 전혀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탁순 탁기탄 남가라는 532년을 전후한 시기에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주장하면서「일본서기」를 부인한다.백제가 영산 김해 창원을 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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