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유사사학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본서기」를 날조 해석하여, 야마토왜가 가야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일본서기」 249년(신공49년) 이야기를, 249년을 369년으로 바꾸고, 일본을 백제로,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고 변조하고,정복을 상호선린우호관계로 날조한 후,다음의 「일본서기」 262년 기사를 날조하여 382년 가야가 백제의 실질적 지배 하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62년에 신라가 조공해오지 않았다. 그 해에 습진언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백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나루에서 사지비궤을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사지비궤는 그 미녀를 받고는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의 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은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해 왔다. 백제는 이들을 두터이 대우하였다. 가라국 왕의 누이인 기전지(旣殿至)가 대왜(大倭)에 가서 ‘천황은 사지비궤을 보내어 신라를 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지비궤는 신라의 미녀를 받고 신라를 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 인민 모두가 떠도는 신세가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와서 아룁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은 매우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가서 가라에 모여 그 나라의 사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다.” 어떤 책에서는 “사지비궤는 천황이 노하였음을 알고 감히 공공연히 귀국할 수 없어 몰래 잠입하였다. 그 누이동생은 황궁에서 일하고 있었다. 비궤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렸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게 하였다. 누이동생은 꿈을 핑계 삼아 ‘어젯밤 꿈에서 사지비궤를 보았습니다.’라고 아뢰자 천황은 ‘어떻게 감히 비궤가 돌아올 수 있는가.’라며 몹시 분노하였다. 누이동생이 이말을 전하자 비궤는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석굴에 들어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위 「일본서기」 내용은 열도의 마을국가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고대국가들 관계에서는, 미인 두 명에 의해 공격대상이 바뀌는 것도, 공격대상이 변경되어 공격 받은 나라가 갑자기 망하는 것도, 망한 나라가 금방 복구된다는 것도, 인민이 왕과 함께 이웃 나라로 도망가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내용상 마을국가들 사이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백제의 담로가 신라마을을 통제하라고 보낸 사람들이 뇌물을 받고 가라마을을 괴롭히니, 담로정부가 백제마을을 시켜 먼저 보낸 사람들을 처리했다고 보아야 말이 된다. 강단유사사학은 이 이야기에서, 262년을 382년으로 바꾸고, 일본이 보낸 사람을 삭제하고, 가야 침략자를 일본에서 신라로 날조하고, 가야 구원자도 일본의 명령을 받는 백제에서 백제로 날조한 후, 382년 신라가 가야를 침입하였는데, 백제가 가야를 구원하였다는 가공의 역사를 창작한다. 이어서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간 가야는 백제가 요청한 야마토왜 군대의 가야 주둔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소설을 창작한다.
한편<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400년과 404년 백제가 끌어들인 야마토왜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고령가야는 야마토왜에게 대고구려전의 전진기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382년 이래 고령가야는 실질적으로 백제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었다. --- 369년 이래 백제와 상하관계를 맺고 있던 가야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친 신라의 침입과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해서 더욱 백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가야와 백제와의 형식적인 상하관계는 실질적인 상하관계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고령가야는 백제의 직접 구원을 받고 야마토왜에게 전진기지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백제와의 관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탁순을 제치고 백제와의 관계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의 위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소설이다. 먼저 전술하였듯이 야마토왜의 실체가 없다. 일본인들조차 야마토왜가 가공임을 알고 있어, 일본 고대사 시대구분에 야마토왕국 시대는 없다. 백제 멸망 전까지 열도에는 도성도 왕궁도 없다. 광개토대왕릉비문 400년과 404년에 나오는 왜는 모두 백제의 주민이다. 400년 동원된 왜는 열도의 왜로서 바로 신라 해안으로 공격했고, 404년 동원된 왜는 요동반도의 왜이다. 모두 가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가야가 가공의 야마토왜에게 대고구려 전진기지를 제공했다는 것은 어떤 근거도 없는, 강단유사사학의 상상에 불과하다. 고령이니 탁순이니 하는 이야기도 근거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그들은 탁순의 위치에 관해서도 창원, 칠원, 대구, 의령 등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바보가 아닌 한 열도 마을국가들간의 이야기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본서기」의 문언을 마음대로 파괴하여, 한반도 남부의 이야기로 날조하고, 있지도 않았던 야마토왜 정권을 창설하고, 나아가 야마토왜의 해외군사기지까지 날조하는 그들의 상상력과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정은 일제유사사학을 뛰어넘는 청출어람의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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