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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유사사학이 위서라 주장하는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남국 기술이 『후한서』와 일치한다. 『규원사화』는 탕왕 때 후퇴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이 부분도 『후한서』와 일치한다. 강단유사사학은 『후한서』가 우리 사서라면 날조라 주장했을 텐데 중국 사서여서 그러지도 못한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후한서』가 중국 동부를 동이의 땅이라 하고, 『삼국지』와 『후한서』가 삼한이 방 사천리라 하므로 그에 부합하게 추론할 것이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날조에 날조를 거듭하고 억지에 억지를 거듭하여, 한민족은 BCE 12세기에 석기시대를 벗어나 BCE 7세기에나 요동에서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되지만 진개에 의해 평양으로 쫓겨났다가 漢의 식민지가 되고, 한반도 남부는 4세기까지 70여개 소국이 있었다가 왜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동이가 조선이면 위험하다고 협박하며, 환국 신시국 조선은 물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까지 지워버리는 공상 역사소설을 창작한다. 요서지역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강단유사사학이 억지 쓸 여지가 추호 만큼 있을지 몰라도, 요서지역의 유적·유물에 의해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성립 불가능하게 되었다. 강단유사사학은 고인돌이 BCE 12세기 이후의 청동기 시대에 등장한다고 주장하는데, 요동과 한반도가 BCE 12세기 이전에 신석기시대에 있었다면, 요서지역 사람들이 몇천 년이나 문명단계가 뒤처진 사람들을 놔두지 않고 정복했을 것이다. 그 경우 요동과 한반도에 독자적인 청동기문화 즉 강단유사사학이 주장하는 청동기의 고인돌이라는 것이 발생할 수 없게 되어,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모순이 된다.
중국 팽창주의자의 고민은 부사년이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이라 사기치며 억지를 써도, 온통 이(夷)만 나오고 하(夏)도 이로 밝혀져 도대체 하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반도와 요서지역의 사람들이 문명단계가 천년에서 이천년 뒤진 중국의 원주민을 지배하며 중국의 역사가 시작되므로 하(夏)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중국은 건국의 당위성과 건국주체의 신성성을 확보하고 문학적 완결성을 갖춘 건국사화가 없다. 그래서 중국은 동이는 조선이 아니라고 날조하고, 강단유사사학도 여기에 동조한다.
중국은 우리 민족이 원주민을 지배하면서 문명이 시작되므로, 동이는 중국 문명 초기에는 동쪽에서 온 지배자를 의미하다가, 나중에는 중국 동부에 있는, 우리나라의 서쪽인 번한과 번조선을 의미하게 되었다. 재야유사사학은 삼한조선의 강역을 난하로 제한한다. 그들도 중국 동부는 우리 민족의 역사강역이 아니고, 우리 민족이 이전에 거주했던 곳으로 인식하는 점에서 강단유사사학과 동일하다. 우리 역사의 최대 날조는 삼한조선의 시기와 강역을 부정하는 것이다. 삼한조선이 BCE 24세기에 중국 동부를 포함한 방사천리의 나라로 건국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면, 그 전의 역사도 그 후의 역사도 모두 왜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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