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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는 소아입록(蘇我入鹿)이 살해된 다음 해 효덕이 대화개신이라는 정치개혁을 하였다고 한다. 대화개신의 지시 1조는 한서(漢書)와 동일하고, 2조는 757년 시행된 양로령(養老令) 가운데의 양로호령 양로선서령 양로공식령과 동일하고, 3조는 양로호령 양로전령과 동일하며, 4조는 양로부역령과 동일하다. 또 1조의 식봉(食封)과 2조의 군사(郡司)는 757년 양로령에 의해 비로소 제도화된 것이다. 즉 대화개신은 조작된 기사이다. 일제유사사학은 대화개신의 지시문이 645년 이전의 야마토왜 지방조직을 아는 유일한 문헌이라 주장한다. 즉 대화개신의 지시문을 부정하면, 7세기 국가로서의 야마토왜는 그 존재 기반을 상실한다. 그래서 일제유사사학은 지시문 자체는 당시의 것이지만 문장은 그 뒤의 것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며 가공의 야마토왜 왕국을 방어한다.
645년 소아입록 살해는 백제 중앙정부의 지방 토호세력 처단이다. 소아가문은 587년 물부 가문을 무너뜨리고, 나라 지역의 유일한 토호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파견 관료인 왜왕을 무시하며 전횡하였다. 소아가문은 607년 백제 중앙정부의 사전 허락 없이 수에 사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당시 백제는 수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통제하려 하였으므로 수에게 무례한 국서를 보낼 이유가 없었다. 소아가문은 백제가 쇠약해지자, 백제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자신들에게 어떤 조치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이상한 외교문서를 통해 백제 중앙정부를 시험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백제는 수가 열도로 보내는 사신을 수행한 소가 가문의 사람이 소지한 수의 국서를 징발하고 열도에서는 백제와 구별된 왜가 있는 것처럼 수를 속이는 수준으로만 대처하였다. 무왕은 백제 귀족세력과 사이가 좋지 않아 소가가문을 방치한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 초기 의자왕이 귀족세력에 굴복하면서 소가가문을 처단한 것으로 추측된다. 즉 6세기부터 시작된 나라에 대한 백제의 지배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중간에 소가가문이라는 토호세력이 파견관료인 왜왕을 무시하는 기간이 있었으나, 백제 지배가 중단된 시기는 없었다. 대화개신은 날조된 야마토왜 왕국의 근거를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날조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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