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과의 스캔들 이후 9년이 흐른 1444년 1월 11일, 장미가 돌연 의금부로 붙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배를 갔던 이인이 장미와의 스캔들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그녀와 사통한 진짜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 김경재라는 인물이었다고 폭로하고 나선 것. 심지어 이인과 김경재는 처남-매부지간이었다.
의금부에서는 장미와 김경재를 붙잡아 재수사에 돌입했다. 김경재는 결국 장미가 자신의 집에서 함께 숙박했던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장미는 김경재와 사통한 것이 아니라 이인의 할머니를 모시고 가서 함께 잔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해 5월 8일, 의금부는 조사결과, 궁녀의 신분으로 외간 남자들과 놀아났다는 혐의로 끝내 장미와 김경재, 이인 세 사람에게 모두 참수형을 구형한다. 억울하다고 주장했던 이인 역시 실제로는 장미와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세종은 판결을 뒤집어 김경재는 관노로 강등시키고 이인은 유배지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처벌을 낮췄으나, 오직 장미만 참수형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이에 신하들이 세 사람의 죄가 막상막하인데 두 남자의 죄만 눈감아준다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으나, 세종은 "장미는 거짓말(병을 핑계로 출궁한 것)로 죽는 것이지, 간통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자신의 결정을 굽히지 않았다.
세종은 장미를 처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 아버지는 귀양을 보내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관노비로 삼는 비정한 후속조치까지 내렸다.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여러 가지 문제적 사건에 연루되고도 불사조처럼 살아났던 장미는, 끝내 궁녀의 본분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오명을 뒤집어쓴 채 궁궐에서 사라져야 했다.
실록에는 장미 외에도 궁녀와 관련된 스캔들이 간간이 등장한다. 18대 현종 시절에는 귀열이라는 궁녀가 승은을 입지 않았음에도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수사 결과 드러난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귀열과 사통한 남자가 바로 그녀의 형부였다는 것이다. 현종은 귀열이 출산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녀를 처형했다.
또한 조선 7대 세조 시절에는 덕중이라는 궁녀가 승은을 입었음에도 세조의 조카인 귀성군 이준을 짝사랑하여 몰래 연애편지를 보냈다가 적발 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분노한 세조는 덕중을 비롯하여 연애편지를 귀성군에게 전달한 두 환관까지 모두 처형시켰다. 다만 귀성군만은 덕중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했다. 이처럼 궁녀에게는 그저 순수한 짝사랑조차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 조선 사회의 현실이었다.
승은좀 주고싶다.
게 아무도 없느냐
내가 왔다.
훈민정음.을 백성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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