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후 대구는
농업의 주요 생산지로, 또 영남 내륙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그 후 세조 12년(1466)에 도호부가 설치되어 군사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높아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조 34년(1601)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이후 영남지역의 행정·교통·군사를 통할하는 명실상부한 중심지역이 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던 시기 일제의 침략이 점차 노골화되자
1907년 국내 최초로 대구에서는
절미·금연·금주를 통하여 기울어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자,
1915년 영남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은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였고,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처럼 대구지역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 중 하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해외 귀환동포와 월남한 피난민의 유입으로 급격한 인구증가를 보게 되었고, 1950년 6.25전쟁기에는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1960년 대구에서 일어난 2·28학생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대구는 일제 치하 어서도 항일운동 은 열심히 한곳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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